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셀레우코스 제국 (문단 편집) === [[안티오코스 3세]]: 최전성기 === [[파일:터키 셀레우코스.jpg|width=800]]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역(기원전200년경). [[그리스]]와 [[아나톨리아]]로 확장하기 이전, 이때 파르티아가 떨어져 나온 것이 확인된다. 안티오코스 3세는 권신 헤르미아스, 페르시아의 사트라프인 몰론과 알렉산드로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동방이 안정되자 아나톨리아의 아카이오스 2세까지 토벌하면서 내전을 종식했다. 이후 제4차 [[시리아 전쟁]]에 착수한 그는 지난 전쟁때 상실한 영토를 탈환한 뒤 이집트를 침공했으나, 기원전 217년 [[라피아 전투]]에서 큰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패배했다. 하지만 승리한 프톨레마이오스 측의 피해도 컸으므로 별다른 영토 손실 없이 휴전이 이루어졌다. 전쟁에서 돌아온 뒤,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문관과 무관으로 나뉘어 있던 관제를 개혁하여 문•무관의 대립을 없앴으며, 알렉산드로스 시대에 추진되었던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제도를 혼합하여 제국의 실정에 맞게 만든 개혁을 완수하였다. 이 개혁으로 '스트라테고이'(장군; 페르시아의 사트라프와 유사한 제도)라고 불리우는 지방 총독들이 문•무관을 통합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도 안티오키아만으로는 광활한 제국령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없었으므로 [[리디아]]의 사르디스와 [[메소포타미아]] 셀레우케이아에 각각 행정 관청을 두어 각각 서방/동방을 관장하게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그리스 문화를 동방의 문화보다 중시하였기 때문에 토착 세력의 반발을 야기하기도 했다. 한편 군주 숭배 사상을 확립하였다. [[파일:셀레우코스 터키 2.jpg|width=800]]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의 확장(진한 파랑색) 개혁을 마친 안티오코스 3세는 10년에 걸친 대규모 동방 원정을 단행했다. '''안티오코스 3세의 [[아나바시스]]'''라고도 하는 이 원정을 통해 [[아르메니아]]를 멸망시키고[* 이때 예르반두니 왕조(Երվանդունիներ)가 패망하고 셀레우코스 왕조에 충성하는 아르타쉐스라는 아르메니아인이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10여 년 후 아르탁시아가 반란을 일으켜 아르탁시아 왕조(Արտաշեսյան)를 세워 셀레우코스 왕조는 지배권을 상실했다.] 파르티아와 박트리아의 복종을 받아냈다.[* 파르티아의 수도 헤카톰필로스를 함락시키고 박트리아 군대 역시 초전에 무찔렀으나, 파르티아 왕가는 도망갔고, 박트리아는 수도 박트라에 틀어박혔으므로 수년간 포위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결국 파르티아는 왕이라는 칭호를 쓰는 대신 안티오코스 3세에게 복종하기로 하고, 박트리아는 종주권을 인정받은 후 왕족간 통혼을 했다.] 나아가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근방인 파로파미사다이의 [[인도]]계 군주와도 외교관계를 정립하고 [[코끼리]]도 많이 받은 그는 당당하게 시리아로 개선하였다. 시리아로 돌아온 안티오코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죽은 것을 알고, 기원전 198년 파니온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군대에게 대승을 거두어[* 이때 기병 전투에서 [[카타프락토이]]의 활용이 대성공을 거뒀고, 이로 인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헤타이로이]]도 중무장화된다.] 라피아에서의 패전을 설욕하고 [[팔레스타인]]을 차지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공격하기 전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어 두었는데, 마침 필리포스 5세가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패배하자 이를 구실로 [[그리스]] 본토까지 넘보게 된다. 마침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한 [[한니발 바르카]]가 셀레우코스 왕조에 망명해 왔고, 이에 고무된 안티오코스 3세는 대군을 일으켜 그리스 본토를 침공했다. 하지만 그리스 본토를 공격하러 간 선발대는 테르모퓔라이 전투에서 대패했고, 오히려 로마 측의 역공을 당하게 되었다. 안티오코스 3세가 직접 지휘한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70,000명에 달하는 대군이 패배하면서 셀레우코스 왕조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마그네시아의 패전은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안 그래도 한정되어 있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사적 자산이 완전히 뿌리뽑혔으며,[*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16,000명이 궤멸되었으며, 전투 [[코끼리]] 부대도 완전히 해체되었다.] 타우로스 산맥 서쪽 [[아나톨리아]]의 모든 영토를 상실했다. 거기다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까지 지불해야 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방 약탈 원정[* 말 그대로 신전을 털어버렸다.]을 떠나다가 기원전 187년에 암살당했다. 형식적으로 복종하던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 박트리아는 셀레우코스 군사력의 몰락을 확인하고 다시 활개치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